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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memory (인상에 남는 글귀)

 

1994년 여름. 나는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간 다음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 중국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스페인 젋은이들이 마치 제집 안방인 양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혼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때 내 손에는 편지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평양을 떠나던 날 도착한 선화의 편지였다. 무려 열 장이 넘는 장문의 편지 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모니카야, 늘 당당하고 씩씩하게 살아줘. 가다 멈추지 말고, 멀리 들러가거나 헤매고 방황하더라도 반드시 너의 여행을 끝내야 해.'

 

(중략)

 

"너의 여행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구나."

"마리벨, 난 죽을 때까지 여행을 할 거야. 북극도, 남극도 내 눈으로 직접 볼거야. 너무 오랫동안 마음을 가둬뒀으니까 이제 영원히 열어 놓고 다닐 거야."

뉴욕에서 얻은 가장 큰 교휸이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가능하면 내가 직접 보고 느껴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방송이든 신문이든 100%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프레임을 거친 내용일 테니까. 세상은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보이는 것만으로 남을 함부로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또 스스로를 가두는 짓인지도 알게 되었다. 남과 북, 그리고 미국과 북한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만 봐도 너무 괴로운데 개개인마처 그런다면 세상이 얼마나 우울해질까. 

 나는 이제 다시 백지 상태가 되어 서울로 떠날 것이다. 평양에서 사는 동안 남한에 대한 증오를 배워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으니 이번 여행은 좀 더 자유로울 것이다.

 마드리드를 떠나는 날, 어김없이 또 눈이 내렸다. 이제 눈 내리지 않는 마드리드 공항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혼자 가방을 들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정작 숨 막힐 정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중략)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말할 수없어 그냥 '나는 모니카예요'라며 스스로 조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날들도 많았다. 하지만 서울 생활이 끝날 즈음에서야 나는 비로소 푹 쉬었다는 느낌이 든다. 조국이란 말은 입 밖으로 크게 외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을 나는 서울에서 얻었다. 평양에서 배우고 서울에서 깨달았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한반도가 고향이다. 언젠가 누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모니카 씨, 나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들에게 엄마의 삶을 한 마디로 어떻게 애기해줄 수 있을까요?"
나는 아주 짧게 대답했다.
"한반도.'"


2009년 봄. 나는 인천공항에서 또 다른 나라로 떠났다.
평양을 떠날 때 나는 '안녕'이라고 말했었다. 사라고사를 떠날 때도, 마드리드를 떠날 때도, 그리고 뉴욕을 떠날 때도 나는 'Goodbye'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날 때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나는 집시처럼 중국, 일본, 홍콩, 포르투갈,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를 다녔다. 외롭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았다. 내 마음에 '서울'이라는 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Think (생각하기)

  

최근에 탈북자 영상을 접하면서 북한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자연스레 손이 간 책이다. 

 

적도기니에서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북한에서 16년을 산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이야기는 기구했고 새로웠고 또 뻔하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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